괜히 억울한 온이

조금이라도 따뜻한 햇볕이 있을 때 김장한다고 곳곳에서 바쁘게 움직입니다. 올해는 배추가 잘 자라지 않아 배추 값이 많이 올랐습니다. 배추 값이 오르면 시골에서도 김장 인심이 넉넉할 수 없습니다.

김장하는 날엔 마을사람들뿐만 아니라 오가는 사람들까지 불러 함께 돕기도 하고 새로 담근 김치에 돼지고기를 삶아 싸 먹으며 마을 잔치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집니다. 집집마다 김장을 하는지라 김치가 없을 리 없건만 김치 맛보라며 이집 저집에서 싸주는 통에 여러 집 김치가 모여 김치백화점이 되는 게 시골 김장철 풍경입니다.

하지만 올해는 이런 분위기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집집마다 가족끼리 조용한 분위기로 김치만 열심히 담고 있습니다. 배추밭에서 뽑히지도 않은 채 농부의 심정처럼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던 배추를 올해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김장하고 남은 배추도 찾는 사람이 있어 배추 심은 시골 할머니들은 조금의 돈이라도 만지게 되어 기쁨을 감추지 못합니다. 항상 농산물이 제 값어치를 받지 못하다가 몇 년 만에 한 번씩 가치를 인정받는 재미로 꿋꿋이 땅을 지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풍경을 보고 있으면 어떤 일이든 한 가지 면만 있는 게 아님을 느낍니다.

이미 아는 분들은 알겠지만 온이는 몇 년째 우리와 함께 사는 용감한 개입니다. 깊은 산골이다 보니 애완으로 키우는 개는 소용이 없습니다.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 야생동물로 부터 안전하려면 몸집도 크고 용맹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서양에서 들여온 몸집이 턱없이 큰 개여야 하는 건 아닙니다.

몇 번 경험으로 우리 지형엔 우리나라에서 꾸준히 살아온 개가 더 맞는 것 같습니다. 강아지 때부터 산을 누비며 살아선지 온이는 용맹스럽습니다. 사람한텐 그리 온순하고 친절한 온이는 집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멧돼지나 족제비, 삵 등을 얼씬도 못하게 합니다.

꾸준히 영역을 넓혀 아랫동네까지 자기영역으로 만든 온이는 동네 수컷은 모두 자기 발아래 두어야 직성이 풀리는 개입니다. 수캐가 자기 앞에서 네발로 돌아다니는 꼴을 보지 못하는 온이는 수컷만 보면 달려가 으르렁 거리며 땅바닥에 누워 배를 드러낼 때까지 가만 두질 못합니다.

이러다보니 아랫동네 개가 온이한테 물려 여러 번 항의전화를 받아야 했습니다. 개를 키워본 사람들은 자기 개가 물리고 들어오면 얼마나 마음 상하는지 압니다. 비록 개끼리 서열을 정하기 위해 싸운 거라 해도 팔이 안으로 굽듯이 자기 집 개가 다른 개한테 물려 피가 나고 다리를 절룩거리면 마음이 상합니다.

지금은 개를 묶어 키우지 않으면 주인한테 모든 책임이 있는 시대라 개를 묶어 키워야 하지만 세 가구 사는 산골에서 개를 묶어 키우기엔 어려움이 많습니다. 야생동물들도 개가 묶였는지, 아닌지를 귀신같이 알고 개만 묶여 있으면 집 뒤 고구마밭, 감자밭을 바로 침범합니다.

동네 세 집이 암묵적 합의로 개를 풀어 키우는데, 문제는 온이가 아랫마을을 자주 다니는 것입니다. 아랫마을 암캐가 발정하는 때엔 정신을 못 차리고 아랫마을로 내려갑니다. 이럴 땐 온이도 무척 예민합니다. 근처에 수캐가 있기라도 하면 물어 죽일 듯이 달려들어 상처를 내곤합니다. 하는 수없이 이럴 땐 온이를 묶어야 합니다. 몇 년 동안 온이와 함께 살아 표정과 동작만 봐도 아랫마을 암캐가 발정 났는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온이가 아랫마을이 아니라 우리 마을에서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윗집에 수캐 한 마리와 암캐 한 마리가 있습니다. 물론 윗집 수캐도 온이 앞에선 네 발로 다닐 수 없습니다. 한 번도 온이에게 덤빈 적 없고 온이 근처에 얼씬 거리지도 않습니다.

조카 결혼식 때문에 1박2일로 여수에 가 있는데 윗집에 사는 분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를 받자마자 "온이가…" 라는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여러 번 온이 때문에 항의전화를 받은 터라 이번에도 온이가 아랫마을 개를 물어 무슨 사단이 났나보다 하며 뒷말을 듣기도 전에 가슴이 먼저 내려앉았습니다.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들은 자초지종은 윗집 개 왕초를 물어 목에서도 귀에서도 피가 나 온이는 묶어놓았다는 얘기였습니다. 우리마을 개를 물었고 개가 죽지도 않았고 온이를 집에 묶어놓았다는 것이니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왕초는 얼마나 다쳤는지 몇 번 물어보며 전화를 끊었지만 얘기를 종합해보면 윗집 암캐가 발정이 났고 온이가 윗집에 올라갔는데 항상 온이한테 눌려있던 왕초도 자기 집이라고 고분고분하지 않았는지 온이한테 물려 피가 나고 상처를 입은 거였습니다.

옛말에 ‘개도 자기집 앞에서는 반은 먹고 들어간다’고 합니다. 개를 키우다 보면 주인이 있을 때와 없을 때 개의 표정과 행동이 확연히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왕초가 보기에 우리는 외출해 없고 자기집이고 주인까지 있는 상황이라 한번은 항의를 해본 모양인데 일이 이렇게 돼버렸습니다.

하는 수없이 온이는 윗집 암캐 발정이 끝날 때까지 10여일을 묶여야 했습니다. 다음날 집에 돌아와 보니 묶인 온이는 자기는 할 일을 했을 뿐인데 괜히 사람이 개입해 묶였다는 억울한 표정으로 하소연했습니다.

‘온이야,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네가 풀어져 있으면 윗집 수캐는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당분간 참아다오’하고 온이를 달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묶여있지 않던 개는 묶으려고 목줄만 잡아도 묶이지 않으려고 도망 다니거나 시무룩한 표정을 짓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묶을 때마다 온이 표정은 세상을 다 잃은 표정입니다.

어디 동물만 그러겠습니까? 사람도 묶이고 갇히는 걸 무척이나 싫어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묶이는 삶을 살지 않기 위해 무수히 노력합니다.

하지만 몸이 묶이고 갇히는 건 너무도 잘 알면서 마음이 묶이고 갇히는 건 잘 알아채지 못합니다. 어쩌다 마음이 갇히고 묶여 있음을 알아챈다 해도 어떻게 벗어나 자유로워질지 알지 못합니다. 10일 동안 묶여있는 온이를 보면서 마음이 자유로운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뒤돌아봅니다.